북한, 결핵 환자 방치…“UN 지원 약품 뒤로 빼돌려 팔아”

안녕하십니까. 이광백입니다. 2015년 유엔은 대한민국 서울에 인권사무소를 설치해 북한의 인권상황을 감시하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정부도 2016년 말 탈북민들의 증언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록은 통일 후 인권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결정적인 법적 근거가 될 것입니다.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어떤 인권문제가 있는지 이야기해 봅니다. 지금도 북한에서 인권침해를 지속하고 있는 가해자들이 인권침해 행위를 중단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김정은은 집권 초기인 2014년 1월, 북한 내 급증하는 결핵 환자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2017년까지 전국적으로 결핵을 퇴치하라는 방침을 긴급하게 내렸습니다. 하지만 김정은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결핵으로 고통받는 북한 주민들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는데요. 북한 전역에서 결핵 실태 조사를 해오고 있는 세계보건기구는 2017결핵보고서에서 2016년에 발생한 북한 내 결핵환자 수가 13만 명으로 한 해 전인 2015년보다 2만 명이나 늘어났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결핵으로 사망한 수는 1만 1천 명으로 전년보다 두 배가 늘었다고 합니다. 북한에서 결핵에 걸린 조카를 병간호했던 박주희 씨를 통해, 결핵 실태를 들어봅니다.

– 지난주에 이어 박주희 씨와 함께합니다. 안녕하세요? 지난주에는 밀수입을 하다가 고초를 당한 이야기를 해주셨는데요. 오늘은 결핵에 대한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사실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 웬만한 나라에서는 결핵을 치료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라고 해요. 환자의 수도 대단히 적고, 거의 없는 나라도 있고요. 북한은 여전히 결핵 환자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박주희 씨 본인은 이 병에 걸려본 적이 있나요?

저는 없었어요.

– 조카가 결핵에 걸렸다고 하는 건데, 언제쯤이었나요?

2009년도로 기억돼요. 제가 병간호를 했거든요. 북한에서 말하면 개방성, 결핵균이 밖으로 나오는 그런 결핵에 조카가 걸렸어요. 격리돼서 치료도 받고 요양원에도 다녔어요. 제가 많이 데리고 다녔죠. 언니가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이모인 제가 나섰던 것이죠.

– 그렇다면 왜 결핵에 걸리게 된 걸까요?

형부가 군 복무할 때 금강산 발전소 건설에 참여했는데 거기서 갱도를 뚫다 보니 먼지가 많고 잘 먹지 못 해서 결핵에 걸렸던 거예요. 거기서 대충 치료를 해서 폐가 석회화가 됐다고 했죠. 제대해서는 재발을 안 해서 몰랐고 그래서 언니도 결혼을 했던 거죠. 그런데 결핵이라는 게 몸에 잠복하다 있다가 사람이 쇠약해지고 영양이 부족하면 병이 나타난다고 해요. 애(조카)가 그 병이 생겨서 알아보니 그때 형부가 내가 결핵이 있다고 하면 결혼을 못 할 것 같아 속였다고 했어요. 결국은 유전인 거죠.

– 유전일 수도 있고 결핵은 옮을 수도 있으니 아이와 같이 생활하다가 균이 옮겨서 질병에 걸렸을 수도 있겠군요. 당시 조카의 증상은 심각했나요?

처음에는 미열이 났어요. 계속 잔기침을 하고 그랬어요. 언젠가부터 기침을 하는데 피가 조금씩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언니도 장사를 하고 정신이 없다 보니 ‘그냥 감기겠지’ 하고 방치했어요. 그런데 제가 집에 가서 그 모습을 보고 언니한테 말을 했죠, 심상치 않다고. 그리고는 바로 병원에 가서 CT를 찍었어요. 한 쪽 폐에 구멍이 나서 결핵균이 밖으로 나오고 있다고 했어요. 그 정도로 개방성 결핵이 심각했던 거예요.

병원에서는 이걸 보고 집에 못 데려가게 했어요. 그래서 병동에 격리돼서 하루에 항생제를 세 번 맞아야 했어요. 이런 비용을 다 본인이 내야 했어요. (병원에서는) 딱 침대만 줘요. 겨울이라 추웠는데 장작을 날라 불을 때고 밥을 해서 먹였어요. 그런데 이러다 보니 애가 반쪽이 됐어요. 그렇게 두 달 치료하는 과정에서 살이 쭉 빠지고 (어쩔 수 없이) 아이들만 가는 소아결핵 요양원이라는 곳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죠.

이 곳은 깊은 산골에 있었는데 결핵에 걸린 애들한테 매일 주사를 놔줬어요. 거기서 치료를 하는데 초창기엔 UN에서 결핵약이 많이 왔어요. 요양소 같은 데는 어느 정도 공급을 해줬어요. 실제로 아이들이 요양소에 가게 되면 쌀이나 이런 것들을 부모들이 다 대야 하기 때문에 부모들이 안 보내려고 했어요. 그럴 거면 차라리 집에서 간호하고 약을 먹이자는 거죠. 시장에서 약을 사서 먹이고요.

UN에서는 분명 북한에 있는 결핵 환자들을 위해서 공짜로 보낸건데 처음에는 그 약이 어느 정도 병원으로 오다가 아예 없어진 거예요. 한때는 ‘아 그 약이 적게 왔나 보다’ 했는데 갑자기 시장에 탁 풀린 거죠. 결핵약이 한 가지가 아니라 묶여서 13가지가 됐어요. (UN에서 온) 그 약을 6개월 먹였는데 개방성 결핵 환자가 싹 나았어요. 병원은 결국 몇 명한테만 처방을 해주고 가짜서류만 만들어서 (남은) 약을 빼돌린 거죠. 실제로 환자는 천 명인데 열 명 정도만 주고 끝인 거죠. 그리고 시장에 약이 나오니 결핵 환자가 있는 집들은 이런 약을 사서 먹인 거고요.

– 원래는 약을 공짜로 먹었어야 했는데 현실적으로 대부분 장마당에서 약을 사서 치료를 했다는 거죠?

네, 그도 그렇고 여자애들의 경우 결혼하기가 힘들어서 결핵이 있다는 것을 숨겨요. 어릴 때 결핵 앓았다고 하면 자식도 옮는다고 숨기죠. 어차피 국가가 지원 안 해주고 사비로 치료하니까 집에서 조용히 치료하자는 거죠. UN 보고서가 말하는 게 다 정확한 건 아니에요. 북한의 주민들은 결핵에 대해서 숨겨요. 흉이 되니까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전문으로 보는 제3예방원이라는 게 있어요. 거기 가면 정말 결핵이 심한 환자들이 통계에 잡히는 거죠. 이런 사람들은 가끔 한 번씩 들르면 약을 떼 줘요. 어차피 UN에서 약은 들어오는데 환자들이 있다는 것은 보여줘야 하니까요. 실질적으로 치료하는 데에는 주사약이 돈이 많이 드는데 그건 시장에서 본인이 부담해서 사고 병원에서는 그냥 약을 타서 주사만 놔줄 뿐인 거죠. 그러니까 결핵에 걸리면 그 집 재산이고 뭐고 다 탕진되는 거죠.

– 결핵 치료를 국가의 도움 없이 하게 될 경우 너무 많은 비용이 든다는 거군요. 조카분은 어쨌든 6개월 내내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으신 건가요? 아니면 바로 집으로 데리고 오셨나요?

거의 6개월 동안 요양원에 있었어요. 일단 저희 언니가 쌀도 가져가고 했죠. 개방성이 전염이 심하니까 거기서 집중 치료를 받고 집에서 데리고 왔죠. 그런데 결핵약이 센 항생제여서 다른 장기들을 못 쓰게 해요. 비타민이랑 영양보충을 동시에 해야 하죠. 언니는 염소, 양으로 영양보충 해줬어요. 그리고 집에서 2~3년을 더 치료를 받았어요. 항상 저희 언니는 절기가 바뀔 때마다 애가 기침만 하면 심장이 뚝 떨어지고, 안절부절이었어요. 또 결핵이 도진 것은 아닐까 싶은 거죠. 그래서 결핵이 재발됐는지 알아보지도 않고 결핵약을 사다가 먹였을 정도였어요. 

– 그래서 결국 조카분께서는 결핵을 치료하셨나요?

지금 현재 상태에서는 약간 석회화가 됐다고 말하는데 항상 병원에서는 아이를 잘 먹이라고 했어요. 북한에서 결핵은 잘 먹으면 떨어지는 병이라고 해요. 재발하지 않도록 몸 관리를 잘 시키라고 하죠. 겨울에 나무가 없으니 집이 춥잖아요. 모든 병의 원인이 감기인데, 그렇다고 하루 세끼 잘 먹일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한국처럼 따뜻한 온수난방도 아니고 하니까 솔직히 지금 생각하면 아직도 (조카가) 아프지 않을까 싶어요.

– 그러니까 완전히 치료됐다고 보긴 어렵군요.

결핵은 완전 치료가 안 된다고 알고 있어요.

– 조카 병간호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어떤 거였나요?

옮을까 힘들었어요. 저는 핏줄이잖아요. 그런데도 조카가 기침할 때마다 정말 엄마 이상으로 안타까운데 (다른 한편으로) 내가 결핵에 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고. 지금은 그 조카한테 너무 죄스러워요. 그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데 저는 저대로 제 자식이 있고 살아야 하니까요. 그 때 추운 날 조카를 씻기고 압록강 차가운 물에 빨래하던 게 육체적으로 힘든 게 아니고 내가 이 병에 옮으면 ‘내 가족이 다 망하는데’ 이런 게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항상 마스크를 쓰고 조카한테 말할 때도 ‘침이 튀지 않게 해라’ 늘 주의를 줬던 게 지금 와서는 너무 가슴이 아파요.  

– 그렇군요. 그런데 탈북하기 직전, 그러니까 2012년 당시 주변에 또는 동네에 결핵에 걸린 사람들이 있었나요?

많았어요. 저희 한 개 인민반에 32세대가 있었는데 네다섯 가구는 결핵 환자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대체로 보면 군대 갔다 와서 결핵에 많이 걸리고 돌격대 갔다 와서 결핵에 걸리고 항상 힘든 상황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결핵에 많이 걸려 오더라고요. 그 사람들도 병원에 등록을 안 하고 집에서 조용히 치료하더라고요. 그런데 이걸 다 알죠. ‘저 집 아들이 결핵이 왔다. 그래서 아들이 밖에도 안 나가고 치료제를 대다 준다’고 말이 돌죠. 북한은 인민반장이 집집마다 매일아침 돌아다니면서 돈을 걷고 인민반 동원을 해주기 때문에 비밀이 없어요. 인민반장이나 위생반장을 통해서 동네 소문이 퍼지는 거예요. 병원에 안가냐고 하면 병원 가서 뭘 하냐고 했어요. 결핵 환자가 많았지만 다 자체로 치료를 했어요.

– 그럼 말씀대로 30가구가 조금 넘는 반에서 4, 5가구에 결핵 환자가 있었다면 열에 하나가 결핵 환자라고 봐야겠네요.

맞아요. UN에서 하는 거는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통계를 내준 걸 이야기하는 거고 북한 사람들은 공개를 안 해요. 결핵이란 병을 싫어하기 때문이죠. 병에 걸려도 자기가 치료하는 거예요.

– 세계보건기구가 조사한 통계를 보면 북한에 있는 결핵 환자 수가 13만 명이라고 했는데 여기에 등록되지 않은 환자가 훨씬 많을 거라고 보시는군요?

훨씬 많죠. 여기에 등록된 환자들은 아마 심한 환자들인 것 같아요. 그런데 결핵 초기 환자들은 그냥 딱 진단을 받으면 아예 병원을 끊어요. 결핵 예방원에 가서 옮고 더 심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죠. 결핵 초기 환자들은 거의 등록이 안 됐다고 봐야 정답이죠.

– 치료를 제대로 정부가 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핵 환자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짐작해봅니다.

북한 주민들은 ‘결핵은 병이 아니라 가난이 만들어낸 것이다’라고 대중적으로 인식하고 있어요.

진행: 그렇군요. 지금까지 박주희 씨를 통해서 북한 당국이 책임져주지 않는 주민들의 결핵 실태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오늘 증언 감사합니다. 

가난한 나라일수록 아픈 사람들이 많습니다. 병원 치료는 물론 약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기 때문인데요. 김정은의 결핵 퇴치 방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결핵으로 인해 북한 주민의 건강권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습니다. 박주희 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이에 관한 전문가의 인권법적 의견을 들어보는 시간입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조정현 교수 전화 연결돼 있습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박주희 씨의 오늘 증언을 통해, 어떤 인권법적 문제를 이야기해 볼 수 있을까요?

아시다시피 북한은 인민보건법 제10조에 무상치료제를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들으셨다시피 이는 일부 핵심계층을 제외하곤 사실상 유명무실화된 것으로 파악됩니다. 북한도 당사국인 사회권규약 제12조에는 “당사국은 모든 사람이 도달 가능한 최고 수준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향유할 권리를 가지는 것을 인정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건강권과 같은 사회권의 경우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인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구체적 행동을 할 것을 의무화하고 있는데요, 건강권의 경우엔 적절한 의료제도를 마련하고 필요한 경우 직접 의약품도 제공해 주는 등 개인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국가가 적극적인 활동을 해야만 합니다.

현재 북한은 이러한 공적 의료체제가 붕괴되고 주민들이 사적으로 장마당에서 처방전도 없이 약을 사다가 복용하는 상태로 북한 당국은 주민의 건강권 관련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UN 등의 지원 약품을 담당자들이 빼돌리고 제대로 제공하지 않는다든지, 또 한국이나 국제사회가 인도적 지원을 제의하는 데도 특별한 자체 대책 없이 지원을 거부하는 행위 또한 건강권 관련 의무 위반으로 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예방의학을 강조하는 북한에서 결핵 예방을 위한 백신 접종 등도 적시에 잘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보여 더욱 안타깝습니다. 아울러 식량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못하는 상황이 건강권의 악화로도 자연스레 연결되는 것 같아 또한 안타깝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침해받고 있는 건강권, 식량권에 관한 전문가 의견 들어봤습니다. 조정현 교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