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진 칼럼] 빅딜은 성사될 것인가?

향후 두 달은 지난 20년치를 능가할 외교안보 평론이 봇물을 이룰 것이다. 거기에 뭘 더 하나 얹고 싶진 않으나 잠시 냉철하게 짚어보자.

1.‘빅 매치’는 전적으로 문재인 정권의 공(功)일까?

No. 실효성 있는 대북압박의 결과다. 설령 보수정권이 침묵으로 일관했어도 북미접촉은 다른 채널로라도 타진됐을 거다. 지난 핵 협상의 역사가 이를 증언한다. 기다렸다는 듯 쏟아 붓는 듯한 그를 향한 지나친 찬사는 낯 뜨거운 수사일 뿐이다.

2. ‘만남’은 현실화될까?

낙관할 수 없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순간적인 결단도 미국 조야에서 이성적으로 지지 받지 못한다면 둘의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다. 관건은 ‘조건’인데 미국은 과거 ‘동시이행’ 방식의 수순은 용납하지 않을 거다.

‘공’은 북한에게 넘어갔다. 문 정권은 거간꾼을 넘어 적극적 중자가 되기 위해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온갖 애를 쓸 것이다. 현 정권의 진짜 ‘속내’는 여기에 달렸다고 봐야 타당하다.

3. ‘빅딜’의 조건은 무엇일까?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에로의 전환, 한미동맹 해체, 미군철수, IAEA(국제원자력기구) 사찰 수용, 핵무기 포기, 경제적 지원 등 상상 가능한 모든 쟁점이 잠재돼 있다. 문제는 그 ‘조합’의 내용과 절차다. 협상이 잉태하고 있는 ‘비용’의 문제는 현 단계에서는 신경도 안 쓰는 분위기다.

비용이 단지 돈의 크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협상의 이행과 검증이라는 긴 시간의 과정이 깔려 있다. 그 속에서 어떻게 신뢰를 담보할 것이냐는 근본적 의문이 실행 가능성으로 구체화되지 않는 이상, 협상은 알맹이 없는 정치적 해프닝으로 끝날 것이다.

여하간 북한의 체제보장과 핵무기 포기. 이 둘이 교환의 근간인데 미국이 전자를 약속해줘도 북한이 후자를 실행할 것이냐가 빅딜의 ‘트리거’라는 건 숨길 수 없다.

4. ‘빅딜’의 결과는 무엇인가?

한국의 가치는 이미 광복시절부터 미 국무부와 국방부 사이에 전략적 평가가 엇갈렸던 곳이다. 대한민국이 냉전 시절만큼 미국에게 친밀하게 필요한 곳일까?
베트남은 좋은 벤치마킹 대상이 된다. 북 월맹에 의해 ‘적화(赤化)’된 베트남의 오늘은 대미 국제관계에서 상호 적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미국 입장에서 대(對)중국 레버리지로 활용하는데 요긴하기까지 하다.

미국의 시각에서는 ‘적화’의 결과에 관한 인식의 폭이 넓어지는 실증적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과거와 같은 절대적 공산화라기 보다는 내부적 통치방식에 관한 해당국민들의 선택의 문제일 따름이라고 말이다.

더 이상 미국은 한국의 정치체제에 과거만큼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때론 둔하고 생각만큼 영리하지 못하며 약삭빠르지 않은 듯 보일 때도 있지만, (그래서 지난 30년 간 북한에 끌려온 듯 보여도) 그 과정에서 축적된 학습효과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미국은 북한이고 한국이고 이젠 알만큼 안다. 무엇이 장점이고 무엇이 약점인지, 한국인의 근성까지도 다 파악하고 있을 거란 의미다.

한국이 내부적으로 어떤 정치체제를 선호하든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외교안보 영향력이 유지되는 선에서 북한과 정치적 ‘딜’이 타협점에 이른다면 다른 세부조건은 핵 폐기 문제만을 제외하곤 크게 따질 것 같지 않다.

남은 것은 북한과 한국의 입장이다. 김씨 왕조 독재가 지속되면서 경제 발전이 가능하냐는 숙제가 남았다. ‘핵 무력-경제 병진노선’ 중 전자는 미국과 ‘빅딜’로 대체한다 해도 경제적 발전과 독재체제의 병행은 상극인데 이 둘의 조화를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 것인지 딜레마를 안는 거다. 북한으로선 중국이 벤치마킹 대상이다.

바로 이 지점에 한국 정부, 현 문 정권이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특수성이 작동할 역할이 생기는 거다. 체제를 건 도박을 할 수 있는 위인들이니 말이다. 일단 북한정권의 대외적 보장은 미국에 달린 일이나 북한 체제 내부의 유지와 지속은 한국의 정치경제적 지원이 절실하다. 과거 보수정권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 이제는 무엇이든 가능해진 거다. 북한정권의 숨통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까닭에도 어떤 운명적인 게 작용하는 것일까?

5. 남은 선택지는 어디인가?

결국 다시 그 자리, 가치의 문제로 돌아오고 말았다. 협상을 완성시키는 것은 가치판단의 결단에서 열매를 맺는다. 핵 포기와 체제보장은 상이한 가치의 타협점인 거다. 북한 독재정권이 가진 진짜 문제는 핵이 아니라 인간관에 있다. 인권이란 그 모든 것을 함의하는 개념인 거다. 우리는 여기에 어떻게 할 것인가 답을 해야 한다.

그 대답은 정권이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니다. 한 실존으로 살아가는 개인의 결단에 달린 일이다. 총의(general will)란 절대적 공감대와 컨센서스에 의해 정당화된다. 문 정권이 반복적으로 누구도 묻지 않는 ‘지지율 70%’라는 거짓을 주입시키는 것은 인식의 세뇌를 위한 조작(manipulation)의 전형인 거다.

콘돌리자 라이스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입안한 걸로 알려진 (북한의) 정권교체론(Regime change)은 사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같은 모범답안이긴 했다. 핵과 인권, 경제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기 위해선 고대왕조와도 같은 폭압체제를 자유체제로 바꾸는 길 밖에는 없다.

김정은이 스스로 그 길을 따르겠는가? 체제유지와 경제적인 안정이란 모순된 정책목표를 핵 포기 하나로 보장받을 수 있을까? 그것은 얼마나 또 많은 이들의 고통을 비용으로 지불해야 하는 일일까?

그렇기 때문에 ‘나쁜 평화가 전쟁보단 낫다’는 뻔뻔한 주장은 ‘너는 죽어도 나는 살자’는 위선의 극치가 된다. 거기에 속는 순간, 양심의 분별은 화인(火印)을 맞아 판단은 사라지고 본능만 남게 되는 거다.

한국의 국력이 전세계 140등 정도할 때 세계 1등 미국과 대등한 ‘군사 동맹’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휴전은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기에) ‘북진통일’하겠다는 억지를 부린 이승만의 도덕주의에 미국이 ‘순간’ 설득 당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60여 년이 흐른 지금, 더 이상 이 땅에 양심과 도덕은 찾아보기 어려운 용어가 돼 버렸다. 미국의 지성계도 도덕보다는 현실의 이익이 크게 좌우하는 분위기다. 트럼프는 그 정점에 있는 듯 보인다. 이들이 어떤 계산식을 만들어 낼지 방향은 분명해졌다. 이제 한국민은 어떤 삶을 받아들일지 결단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앞의 글은 모두 3일 전에 써둔 것이다. 오늘(14일) 뉴스를 보니 두 가지가 눈에 띄었다.

첫째, 하루아침에 미 국무장관이 바뀐 것. 그것도 현직 CIA 국장이 바로 국무장관이 되다니 파격 중 파격이다.

둘째, 한국의 현직 대통령이 국회를 믿을 수 없다며 직접 개헌하겠다고 발표한 것.

이 둘은 상호 무관해 보이지만 하나의 방향으로 미국과 한국이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암시를 강하게 풍긴다. 과연 어디로 흘러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