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에 북핵 방어 결연한 의지 보일 국회의원은 없나

국정의 중심축이 실종된 지금, 두 번째 중국을 찾은 야당의원들의 진짜 속내를 알기란 어렵다. 그러나 그들을 환대한 중국의 진심을 헤아리기란 쉽다. 아이러니는 야당이란 존재가 애초에 없는 중국식 정치체제의 리더들이 한국의 야당의원들을 좋아한다는 것과 한국 야당의원들이 오직 유일 여당만 있는 중국에 대단히 우호적이라는 사실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라는 공통분모가 없다면 오만한 중국 관리들이 한국의 야당의원들을 환대했을까?

한국 내 사드의 본질적 목표는 두 가지다. 첫째, 북한의 핵 미사일 위협에 대한 직접적 방어. 둘째, 유사시 한국은 물론 동해에 진입할 미 항모를 타깃으로 할 중국 미사일의 무력화. 중국이 기를 쓰고 한국 내 사드를 반대하는 이유는 이 두 번째 목표 때문이다. 왕이 외교부장은 이를 분명히 밝히고 말았다. “중국의 안보를 왜 위협하느냐”고 말한 것이다.

우리가 중국의 안보를 위협한다니 이 무슨 말인가? 분명 한국의 사드는 탐지거리가 500km도 안돼 중국의 미사일 기지를 탐지하지 못한다고 밝혔음에도 말이다. 반대로 중국의 레이더 탐지거리는 무려 5500km에 달한다. 남한 내 모든 군사시설은 물론이고 알래스카까지 들여다 볼 수 있다. 이런 엄청난 불균형은 아랑곳 않는 왕이의 발언은 안보문제에 관한 비밀을 털어놓은 것과 같다.

그것은 상대가 느끼는 안보위협이란 내가 꼭 공격무기를 갖추어야 위협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창을 막아주는 방패의 존재만으로도 창이 쓸모 없어졌다고 느끼는 것 자체가 위협과 동의어가 된다는 의미다. 중국의 억지스런 사드 반대는 바로 이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실 사드는 동북아 미-중 패권의 장기판 알과 같다. 그렇다고 한국은 단지 미국의 졸(卒)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서울이야말로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지혜를 실현하는 주체라는 인식의 전환을 해보면 중국 정부가 정부 간 공식 라인은 무례히 외면하면서도 안보가 뭔지도 모르는 야당의원들을 환영한 이유를 간단히 유추할 수 있다.

문제는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소아적 공명심에 들떠 방중한 야당의원들이다. 이들이야말로 중국 입장만을 부각시켜주며 중국외교의 ‘쓸모 있게 버리는 카드’로 전락했다. 반면 중국은 적반하장(賊反荷杖) 외교의 진수를 보여준 셈이다. 중국 관광객 제한, 한류 콘텐츠 수입 중단 등 대한(對韓) 제재조치를 황당하게도 중국 국민의 자발적인 ‘민주적 선택’인양 포장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중국이 어떤 나라인가? 정부에 반하는 어떤 세력도 용납하지 않는 일(一)국가주의 체제 아닌가! 일사불란한 지휘통제 기제로 전 인민을 동원할 수 있는 전세계에서 몇 안 남은 사회주의 체제의 노회한 관료들에게 한국의 야당의원들은 거저 굴러 들어온 호박 정도 밖에 안 된다.

국내 주요 신문의 1면에 “사드 배치 일시 중단을”이라는 중국의 입장이 헤드라인으로 실리는 기회를 공짜로 줬으니 중국 정부로서야 얼마나 고마운 민주당 의원들이었을까? 중국의 관제, 어용언론에 한국의 절박한 입장은 어떻게 전달됐을까? “북핵 방어를 위해 사드배치는 필수”라는 정도의 제목이 실렸는가? 어림없다. 이것이 오직 야당 국회의원들만 모르고 있는 현실의 준엄한 실존적 모습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이 못난 야당의원들이 생각하고 있는 안전한 한반도란 현실근거 없이 꿈만 꾸는 그들만의 공허한 관념의 세상인지 말이다. 오히려 사회주의 중국은 지나치리만큼 현실적일 뿐 아니라 용의주도적이기까지 하다. 이 별볼일 없는 야당의원들을 환대해줬으니 그들로선 넘치도록 남는 장사를 한 거다.

분명히 하자. 사드와 같은 핵심적 안보정책은 대통령 개인의 선호에 따라 결정되는 일이 아니다. 국가의 존립과 국민의 안위를 책임진 일국의 결단이다. 야당의원들이 해야 할 일은 중국의 입장을 듣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 우리의 절박함과 결연함을 믿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언제쯤 그런 야당의원들을 볼 수 있을 것인가? 이 허물어가는 대한민국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