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일부 장애인 선전에 적극 활용…대다수는 처우 열악”

북한 선수단이 7일 2018 평창동계패럴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에 입국했다. /사진=연합

2018 평창동계패럴림픽에 북한 장애인 선수들이 직접 참여한 가운데, 이들의 실질적인 처우에 관심이 집중된다.

일각에서는 “이전까지는 북한에서 초대하지도 않았고, 장애인 관련 대화를 진행하지도 않았던 것에 비하면 긍정적”(시나 폴슨 유엔 북한인권서울사무소장)이라는 평가도 나오지만, “선전에 이용됐을 가능성도 있다”는 지적도 만만찮다.

이와 관련, 북한에서 장애를 안고 살아가다 2012년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 박영철(40대, 가명) 씨는 최근 데일리NK와 만나 “원래 체제 선전용 공연에도 우선 선발되곤 했었다”고 말했다. 이런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장애인들은 북한 내에서는 대학 입학 과정 심체검사에서 탈락되는 등 열악한 환경에 처해있다는 것.

그러면서 그는 “한국에 온 북한 장애인 선수는 선전용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다음은 박 씨와의 일문일답]

-일단 북한 장애인 복지에 대해 설명해 달라.

“북한에는 장애인 복지 개념은 없다. 대신 우대정책이라는 말은 있다. 군사복무 중 신체불구가 되면 ‘영예군인증’을 준다. 또 국영공장에서 일하다 다치면 공상불구로 인정돼 노동능력상실자로 판정되기도 한다. 이들에게는 국가로부터 매달 보상금이 지급되는 것이다. 다만 이들에게 지급되는 보상금은 급수별 차이가 있다.

1990년대 공장서 일하다 세 손가락이 잘려 3급 판정을 받았다. 보상금은 당시 10원이었다. 사실 국정가격으로 쌀을 살 수 있다면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쌀(1kg)이 국정가격으로 48전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국정가격은 허울뿐이었다. 암시장에서 옥수수가 8원, 쌀이 16원이었다. 보상금으로는 쌀 1kg도 살 수 없었다.”

-보상금이 오른 적은 없었나.

“2002년 7월 경제관리개선조치로 월급이 상승되면서 장애인 보조금도 올랐다. 10원에서 200원으로 올랐지만 쌀값이 덩달아 오르면서 국가혜택은 여전히 도움 되지 않았다. 당시 쌀 가격이 1000원이었다. 보조금은 푼돈도 안 됐다.”

-어떻게 이겨냈나.

“성분이 안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원이 되려는 꿈도 품었다. 기계공장에서 남보다 몇 배 열심히 하면서 당과 수령에게 충성했다. 갑자기 사고로 장애인이 되면서 입당의 꿈도 접어야 했다. 사람 값이 떨어졌다. 공장 경비를 설 수밖에 없었다. 사회적 약자가 된 것 같아 속상했다.

재기할 방법을 생각했다. 불구자라도 당당한 위치에서 서고 싶었다. 부기(회계)를 하고 싶어 경제전문학교(2년제 전문대학)에 도전했다. 시험에서는 통과됐지만 신체검사에서 탈락됐다. 20대 청춘인데 불구라는 이유로 대학도 못 간다는 생각에 혼자 한없이 울었다. 그때 공장 부기장이 다가왔다. 개성출신이었는데 그 분도 성분이 안 좋았다.

밤마다 개인 살림집에서 회계를 가르쳐줬다. 몇 년 동안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장애인이 주간대학에는 갈 수 없어도 통신대학(야간)에는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몇 년 후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됐다.”

-이후 삶은 좀 나아졌나?

“피나는 노력으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한계는 분명했다. 장애인들이 일하는 경노동직장 지도원은 할 수 있었지만, 역시 성분이 문제였다. 돈 있는 장애인이 행정간부에 등용되곤 했지만, 난 그것도 없었다. 나라에 운명을 맡기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은 산에 들어가 전문 꿀벌치기(양봉) 장사에 뛰어들었다. 내 힘으로 돈을 버는 게 제일이었다. 장애가 심한 사회보장자를 제외하곤 충성자금을 내야 했던 시기다. 나도 1년에 꿀 30kg을 공장에 바쳐야 했다. 또한 공장 당 비서(위원장)용으로 꿀을 따로 바쳤다. 조직생활에 불참하기 위해서였다. 장애인이라고 특별히 봐주는 건 없었지만 오히려 맘은 편했다. 본인 노력으로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매체에서 장애인 청소년들이 공연하는 장면이 방영되곤 한다. 어떤 마음이 드나?

“함경북도 연사군 49호 병원(정신병원)에서 부기를 했었다. 당시 병원 보건과장이 상태가 심하지 않은 환자들로 공연을 조직했다. 환자들에게 노래를 시키면 치료에도 좋다는 이유였다. 수령을 찬양하는 노래를 연습시켜 순회공연을 나가곤 했다.

주변 농장, 부대에서 선전선동대로 공연을 했는데, 높은 당성으로 평가를 받았다. 결국 김정은의 장애인 정책에 호응한 이들이 혜택을 받은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심각하지 않은 신체불구도 체제선전공연에 우선 선발되곤 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철저하게 버려진다.

특히 요즘 평양시에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들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지방에는 찾아볼 수 없다. 이번에 평창에 참여한 북한 장애인 선수들도 김정은식(式) 선전에 동원된 건 아닌지 안타까움이 먼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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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경제 IT 석사